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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고도로 문명화된 인간들이 내 머리 위를 날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않으며, 나 역시 그들에게 적의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흔히 하는 말대로, ‘단지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사적인 삶에서는 결코 살인을 꿈도 꾸지 않을, 마음씨 착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그들 중 한 명이 잘 조준된 폭탄으로 나를 산산조각 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는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칠 일은 결코 없다. 그는 자기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고, 그 나라는 그를 악에서 면죄해 줄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애국심, 즉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지닌 압도적인 위력을 인식해야 한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이것이 무너질 수도 있고, 어떤 수준의 문명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힘으로 따지자면 이것과 견줄 만한 것은 없다. 기독교와 국제 사회주의는 이것에 비하면 지푸라기처럼 약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자국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크게 보면 이 사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반대자들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과 민족 사이의 구분이 실질적인 관점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인간이 매우 비슷하다고 가장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간 행동의 평균치가 나라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한 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6월 숙청은 영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서양 민족 중에서 영국인은 매우 차별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외국인이 영국의 국민성에 불쾌감을 가지는 것에서도 이런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소수의 유럽인만이 영국에서 견딜 수 있으며, 심지어 미국인들조차 유럽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면, 즉시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 몇 분 사이에도 수십 가지 자잘한 것들이 이 느낌을 합심하여 만들어낸다. 맥주는 더 쓰고, 동전은 더 무겁고, 풀은 더 푸르며 광고는 더 노골적이다. 대도시의 군중은 그들의 온화하고 울퉁불퉁한 얼굴, 고르지 못한 치아와 온순한 태도로 유럽의 군중과 다르다. 그러고 나면 영국의 광활함이 당신을 삼켜버리고, 당신은 잠시 온 나라가 하나의 분명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잃는다. 정말로 민족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우리 모두가 저마다 다른 4,600만 개의 개인이 아닐까? 그리고 그 다양성, 그 혼돈! 랭커셔 방직공장의 나막신 소리, 그레이트 노스 로드를 오가는 트럭의 왕복, 노동교환소 앞에 선 줄, 소호 펍에서 울려대는 핀볼 소리, 가을 아침 안개 속에서 성찬식에 가기 위해 도보 여행을 하는 노처녀들 - 이런 것들은 모두 영국 풍경의 단순한 한 조각이 아니라,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어떻게 이 혼란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외국인들과 이야기해보고, 외국 책이나 신문을 읽어 보면 다시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 영국 문명에는 뚜렷하고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스페인 문화만큼이나 개성적인 문화다. 그것은 진한 아침 식사와 우울한 일요일, 연기 자욱한 도시와 구불구불한 도로, 푸른 들판과 붉은 우체통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 자체만의 독특한 맛이 있다. 게다가 그것은 연속적이다. 미래와 과거로 이어지며,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 안에 뭔가가 지속된다. 1940년의 영국이 1840년의 영국과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당신 역시 그렇다. 어머니가 벽난로 위에 간직하고 있는 다섯 살적 당신의 사진 속 아이와 당신이 과연 무엇을 공유하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우연히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로 당신의 문명,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이 그것을 아무리 미워하거나 비웃더라도, 오랜 시간 그것을 떠나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엣 푸딩과 붉은 우체통은 당신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좋든 나쁘든 그것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그것에 속해 있으며,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것이 남긴 흔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추천평>
"이 책의 배경은 영국의 전쟁 중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다. 오웰은 여기서 똑같은 늙은 상류계급 바보들이 집권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무자비한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의 절반은 옳고 나머지 절반은 틀렸거나 1941년 영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약간 엉뚱하다. 당신은 항상 오웰과 함께 약간의 소금과 식초가 섞인 문구를 사용하는데, 이는 정치적 혼란을 읽을 수 있게 한다."
- Paulbreen, Goodreads 독자
"대공습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은 꽤 어려웠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웰이 바깥에서 쏟아져 내리는 혼돈과는 달리 명료함을 전달하는 이 흥미로운 3부작 에세이를 엮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웰을 반공산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는 또한 완고한 사회주의자였고 동시에 오래된 일원이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영국의 계급 제도와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모두 공격한다."
- Jordierern, Goodreads 독자
"이것은 영국을 모든 사람에게 더 살기 좋은 곳, 더 공정한 곳,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오웰의 해결책에 대한 훌륭한 긴 에세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구현되어야 하며 영국의 정치 발전에 대해 제안된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 멀었다는 것을 많이 말해준다."
- Julian, Goodreads 독자
"아주 좋은 읽을거리이다. 생각이 정말 명료하다.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조지 오웰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가장 냉정하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동기와 전문 용어 때문에 존재하는 애매모호함이 전혀 없다."
- Sdiiigerd, Goodreads 독자
"오웰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 형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책은 그가 바로 그 작업을 수행한 작품 중 하나이다. 독자가, 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가 말하는 방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 문체는 긴급하고, 열정적이며, 화가 나고, 자극적이다. 그것은 또한 때때로 일반적으로 오웰과 관련이 없는 서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따끔하고 울림이 있는 한 줄짜리로 가득 차 있다."
- Plsaye, Goodreads 독자
영국의 작가·저널리스트.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인도 아편국 관리였던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 북동부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첫돌을 맞기 전 영국으로 돌아와 “하급 상류 중산층”으로 명문 기숙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와 이튼을 졸업한 뒤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식민지 버마로 건너가 영국의 경찰간부로 일한다. “고약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경찰직을 사직한 뒤, 자발적으로 파리와 런던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발표한다. 1936년은 오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그해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을 취재하여 탄광 노동자의 생활과 삶의 조건 등을 담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을 쓰고,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자마자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내전에 참전하여 『카탈로니아 찬가』(1938)를 펴내면서 자신의 예술적·정치적 입장을 정리해나간다. 그러한 전환점 이후 폐렴 요양차 모로코에 가서 『숨 쉬러 나가다』(1939)를 쓴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BBC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했고 이후 <트리뷴>의 문예 편집장, <옵저버>의 전쟁 특파원 노릇도 한다. 1945년에는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정치 우화 『동물농장』을 출간한다. 또 다른 대표작 『1984』(1949) 집필 중 폐결핵 판정을 받은 그는 1950년 1월 21일, 마흔여섯 나이로 숨을 거둔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오웰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뒤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두 달 동안 랭커셔와 요크셔 일대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면밀한 조사활동을 벌인 결과물이다. “실업을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