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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봄, 공녀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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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봄, 공녀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조혁연 (지은이) 
  • 출판사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출판일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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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북아와 마의 삼각구도

만리장성은 인공 지형물이지만 동북아 민족을 나누는 선이기도 하다. 중원 대륙의 한족은 오랑캐로 불리는 몽골·거란·여진 등의 침입을 대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반대로 북방 민족은 기회만 되면 물산이 풍부한 만리장성 남쪽을 넘봤다. 그 동북아의 틈바구니에 우리 민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북아는 외교적 역학관계에 따라 이른바 ‘마의 삼각구도’를 만들어 냈다. 이 같은 구도가 형성되면 영토나 인구 면에서 늘 열세에 있던 우리 민족은 피해를 받았고, 공녀는 그 부산물로 생겨났다.

역사의 아픈 손가락, 공녀

북방 민족인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의 공급을 강제하였고, 강도는 다소 약했지만, 한족인 명나라도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였다. 우리의 어린 동녀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김찬의 시와 같이 ‘날아서 깃 떠나는 젖먹이 제비 새끼들’처럼 만주벌판을 지나 중국으로 끌려갔다. 동녀의 극소수는 궁인이 되어 ‘말 위에서 비파를 뜯고 음악으로 옥 술잔 들게 하는’ 사치를 누렸다. 그러나 동녀의 대다수는 인격체가 아닌, 유희물 혹은 공물의 대우를 받았다.

빼앗긴, 그리고 짓밟힌 봄

중세를 살던 우리의 동녀들은 물설고 낯선 타국에서 노예 대우를 받다가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를 정도로 오매불망의 사향심을 안은 채 생을 마감했다. 병자호란 때는 환향녀(화냥년)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언니·누나가 멀리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들도 공녀와 마찬가지로 성(性)을 수탈당했다. 그들은 ‘빼앗긴 봄’이었다. 그들은 모두 약소국가에 태어났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인생의 봄을 강대국에 저당 잡혔다. 그들은 ‘짓밟힌 봄’이기도 했다. 수많은 봄이 짓밟혀야 했던 우리 역사 속의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편집자의 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이처럼 노래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리고 오랜 설움을 거쳐, 드디어 빼앗긴 들에도 새봄은 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던지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했고, 안타깝게도 실제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악몽 같은 현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들만을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들에 사는 모두의 봄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들을 빼앗겼던 우리는 우리의 젊은 청년과 처녀들의 푸른 봄을 빼앗겨야만 했고, 그 봄은 아직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빼앗긴 봄에도 봄은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은 미완인 채로 있다.

봄조차 빼앗긴 이들을 위하여,

흉노의 땅에 끌려가야 했던 왕소군을 두고 동방규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그러나 봄이 봄 같지 않은 까닭은 그 땅에 꽃과 풀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봄이 봄 같지 않은 까닭은 비록 드넓은 초원에는 꽃이 흐드러지고 창공엔 제비가 지저귀지만, 그 마음속에는 아직 엄동설한 같은 추위가 이어지는 탓이다. 그들은 우리의 왕소군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봄을 빼앗긴 이들이 있었던 것이 아주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봄을 빼앗긴 환향녀들과 그 이전의 공녀들 역시 들을 빼앗은 자들에 의해 봄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들은 외로운 타향에서 생을 보냈고, 대부분은 거기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린 채 되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봄(見)조차도 빼앗겨야만 했다.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이미 늦어 버린 지금에, 우리가 그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건 고향의 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고향의 봄(見)만큼은 내줄 수 있다. 저자는 홀로 아파야 했던 우리의 ‘봄’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에게 봄(見)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과 함께 아프다 보면, 고달팠던 그들의 봄도 우리 곁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봄을 돌려줄 유일한 길이다. 추운 이 겨울이 지나면 “꿈속에 들어와 푸르”던 그들의 산천에는 또다시 꽃이 필 것이다. 그러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봄은, 우리의 눈이 “추워한다고 덮어 주는 이불”이 될 때, 그때야 온다. 어쩌면, 타향에 끌려간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도 고향 산천의 초목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의 주목이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던 그들의 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저자소개

충청북도 중원(현 충주)의 산골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하던 중 어깨너머로 본 인문학의 세계가 너무 재미있어 뒤늦게 고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충북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고고학과 저널리즘 연구로 석사학위,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과 저서로는 「《병자일기》에 나타난 17세기 충주이안 지역의 농법」, 「《병자일기》에 나타난 17세기 전기의 사노비」, 「광무양안과 대한제국기 충남 문의군의 酒幕」, 「조선 전기의 貢女와 그 친족에 대한 시혜」, 「19세기 충주지역 주막의 연구」, 『조선지지자료』(충북지역 색인) 등이 있다. 청주대학교와 한국교통대학교에 출강하였고, 2019년 현재 충청북도 문화재전문위원과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로 있다.

목차

들어가며 _4



1장 동아시아와 조공질서

화이관, 조공질서를 만들어 내다 _13

한족도 한때는 흉노에 조공하였다 _17



2장 삼국시대의 공녀

고구려 고국원왕, 스스로 신하 됨을 칭하다 _23

벽화로 본 고구려·신라·백제의 조공사절 _26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북위의 공녀 요구 _30



3장 고려시대의 공녀

원나라 사신 저고여의 피살과 공녀 요구의 시작 _35

고려 조정, 공녀 선발을 위해 국가 기구를 설치하다 _38

공녀를 기피하는 그 처절한 모습들 _42

공녀를 바라보던 고려 지식인의 이율배반 _46

공녀를 출세를 위한 뇌물로 바치다 _51

공녀 예방책, 일부다처를 주장하다 _55

고려 공녀, 얼마나 많이 끌려갔을까 _59

몽골에는 ‘고려양’, 고려에는 ‘몽골풍’ _64

원나라 시에 등장하는 고려 공녀의 아름다움 _72



4장 조선시대의 공녀

명 태조 주원장은 왜 조선 왕실과 정략결혼을 추진했을까 _81

1차 공녀, 그녀들은 왜 모두 후궁이 됐을까 _85

2차 공녀 정씨 처녀, 불행을 면하는가 했지만 _98

3차 공녀와 임신 경험이 있던 황씨 _101

1~3차 공녀의 비극적인 죽음과 ‘어여의 난’ _105

4차 공녀, 명나라행 가마에 자물쇠가 채워지다 _112

오라비 출세욕의 희생양(?), 5차 공녀 한계란 _117

6·7차 공녀에는 왜 어린 집찬녀가 많았을까 _121

태종~세종 대의 공녀 일부, 고국으로 돌아오다 _126

공녀 소문에 다시 전국적인 대소동이 일어나다 _129

공녀 차출 소문, 현실이 되다 _133

불쌍한 효종 대 공녀 ‘의순공주’ _138



5장 국내의 「황친」과 그 대우

현인비 오라비 권영균 _148

순비 아버지 임첨년 _151

소의 오라비 이무창 _154

미인 아버지 최득비 _156

정씨 아버지 정윤후 _158

두 한씨의 오라비 한확 _160

오씨의 아버지 오척 _164



나가며 _173

한줄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