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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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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버넌 리 (지은이), 김선형 (옮긴이) 
  • 출판사휴머니스트 
  • 출판일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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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중의 정체성으로 시대를 돌파한 천재
버넌 리의 국내 첫 단행본


헨리 제임스가 “지적인 만큼이나 위험하고 섬뜩하게 낯설다”라고 평가한 영국 작가 버넌 리의 대표 공포소설 세 편을 담았다. 세 작품 모두 작가의 단행본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출간되는 것. 버넌 리의 소설은 인문학적 지식과 파괴적 매력을 두루 갖춘 남다른 캐릭터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표제작인 단편 〈사악한 목소리〉 역시 바그너만을 추종하며 인간의 육성이 만들어낸 음악을 음란하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했던 한 작곡가의 광기를 다룬 작품이다. 버넌 리의 인물들은 모두 아는 만큼 두려워지고, 두려운 만큼 새로워지는 환각과 환영의 세계를 경험한다. 나아가 “왜 꼭 현재가 옳고 과거가 틀려야 하는가?”라고 의심하며 예술과 역사를 축으로 삼아 어떠한 시공간도 단숨에 뛰어넘어버린다. 이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밖에 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동시에 이율배반의 세계나 세월의 흐름, 고정된 젠더의 구분까지 경계 없이 허물어뜨리는 버넌 리 소설만의 다층적이고 독자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과 광기,
여성에 대한 관습적인 제약에 맞서는 낯선 활력


《사악한 목소리》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확신’한다. 나만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나만이 그녀의 진정한 사랑을 얻을 만하다고, 내가 알아보는 가치만이 진짜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반대 지점에 있는 것들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고 치부하며 선을 긋고 배척한다. 버넌 리는 바로 이런 근거 없는 확신을 무너뜨리고 불필요하게 인물들을 구속하는 경계를 지우는 것에서 소설을 시작한다. 버넌 리는 평생 유동적인 삶을 살았다. 본명인 ‘바이얼릿 패짓’과 필명인 ‘버넌 리’라는 이중의 정체성 사이를 경계 없이 오갔고, 영국 작가 에이미 레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성과 오랜 세월 내밀한 관계로 지냈음에도 레즈비언으로 고정되고 규정되기를 거부했다. 젊은 남자처럼 차려입은 채 유럽 전역을 거침없이 여행하기도 했던 버넌 리에게 성 정체성이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 따위는 자신의 현재를 침습하는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관습적인 제약이 남아 있던 시대에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했던 버넌 리의 모습은, 어쩐지 그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과도 닮아 있다.

여행의 즐거움, 각 지역의 친절한 수호 정령들을 찾아 나선 모험은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다.(〈마법의 숲〉, 232∼233쪽)

편집증과 의처증에 사로잡힌 ‘오크 씨’와 권태에 빠진 그의 아내 ‘오크 부인’ 사이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오크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내야 하는 어느 화가의 진술로 진행되는 단편 〈유령 연인〉은 버넌 리 소설의 특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오크 부인은 자신의 선조인 ‘앨리스 오크’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흠모하고, 급기야 앨리스와 연인 관계였던 시인 ‘크리스토퍼 러브록’을 사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여기에 오크 부인의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미학적으로 집착하게 된 화가마저 섬뜩하고 기이한 존재로 변해가면서 소설은 기기묘묘 대혼란의 의식구조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언뜻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던 남성 캐릭터들이 하나둘 망상에 걸려들어 초라하고 피폐해져가는 와중에 여성 캐릭터들만큼은 괴이할지언정 남다른 활력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지독한 권태에 침잠해 있던 오크 부인은 앨리스와 러브록의 피 튀기는 치정과 로맨스에 동참하면서 비로소 ‘팜 파탈’로서의 매력을 드러내고, 단편 〈끈질긴 사랑〉에는 낡은 역사책에서 튀어나온 르네상스 시대의 여인 ‘메데아 다 카르피’가 한 폴란드인 학자를 종횡무진 사로잡아 끝내 참혹한 파국에까지 이르게 한다. 메데아는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자신에게 사로잡힌 남자들끼리 싸우고 살인하다 힘없이 주저앉도록 만든다.

“당신은 지나가면 안 된다고! 당신은 그녀를 가질 수 없어! 그녀는 내 거야. 나만의 여자야!”(〈끈질긴 사랑〉, 171쪽)

통제의 주체라고 자신했던 남성 화자들은 자기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을 향해 허우적거릴 뿐이다. 손에 쥐고 뜻대로 휘둘러야 하는데 잡히지조차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결국 집착은 광기로 변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집착과 광기에 ‘끈질긴 사랑’이라는 으스스한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 버넌 리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대상을 소유하고 장악하려는 남성 인물들의 욕망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그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도록 만든다. 안전거리를 두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그들의 실체 없고 후줄근한 민낯에 오싹해 하고 몸서리치도록 만든다. 역설적이지만 이는 우아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수많은 소설을 번역해온 전문 번역가인 김선형의 번역으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수록작을 세심하게 고르고 유려하게 번역한 김선형 번역자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괴물로 변해가는 자신을 지켜보아야 하는
섬찟한 절망과 공포


버넌 리가 그리는 불안과 공포는 일상적이다.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것이 변했을 때의 낯섦,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전복될 때의 섬뜩함, 자신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버넌 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유령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실질적인 위협을 가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 눈앞에 희미하게 나타날 뿐이다. 선명하고 분명한 것, 단언하고 확언하는 일에 익숙한 우리는 눈앞에 나타난 희미한 형체를 가만둘 수 없다. 선명히 칠하려 해보지만 가능할 리 없다. 대상을 향한 덧없는 시도는 마침내 몸을 틀어 자기 자신을 향한다. 선명하고 분명했던 ‘나’가 서서히 지워지고, 단언하고 확언했던 혀는 마비된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일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괴물로 변해가는 자신을 어쩔 도리 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인물들의 절망과 공포가 섬찟하다.

저자소개

1856년 프랑스 불로뉴에서 살고 있던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바이얼릿 패짓.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버넌 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필명을 쓰는 이유에 대해 “여자가 예술이나 역사, 미학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면 노골적인 경멸심을 드러내지 않고는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버넌 리는 열네 살에 프랑스어로 쓴 소설을 스위스 신문 《라 파미유》에 발표할 정도로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지만 주로 영어로 글을 썼다. 런던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유럽의 다른 나라, 특히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공공연히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던 버넌 리는 젊은 남자처럼 차려입고 거침없이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강경한 반전주의자로 나서기도 했다. 영국 작가 에이미 레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성과 오랜 세월 내밀한 관계로 지냈지만 레즈비언으로 고정되고 규정되기를 거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장 유명한 예술 저서인 《18세기 이탈리아에 대한 연구》(1880), 헨리 제임스에게 헌정한 장편소설 《미스 브라운》(1884), 예술과 역사를 축으로 어떠한 시공간도 단숨에 뛰어넘는 다층적인 매력을 지닌 고딕소설을 모아놓은 《출몰》(1890) 등이 있다. 193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차

유령 연인 _007

끈질긴 사랑 -스피리디온 트렙카의 일기 중에서 _105

사악한 목소리 _175



부록

마법의 숲 _227



해설 | 언캐니, 두려운 낯섦과 중첩된 정체성의 공포 미학 _238

한줄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