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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노을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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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노을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강명희 (지은이) 
  • 출판사청어 
  • 출판일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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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포근함을 아로새긴 노을빛 이야기들
추억을 엮어 인생을 담은 강명희 소설집


**아버지의 질서 꿈꾸는 천의무봉 이야기꾼
- 강명희의 소설집 『서른 개의 노을』

*서정자(문학평론가·전 초당대 부총장)

*히말라야의 이미지

강명희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히말라야바위취』를 재미있게 읽었다. 등단한 지 10년이 넘어 나온 소설집인데 언젠가 소설을 써서 가지고 있는 작품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나는, 소설집 출간이 반갑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다.
두 번째 소설집 『서른 개의 노을』도 부담 없이 즐겁게 읽힌다. 소설이 읽는 즐거움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소설 일반에서 보이는 난해함을 일단 벗어나 있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소설집의 제목이 된 단편 「서른 개의 노을」을 읽고 나는 이것이 작가의 부단한 노력과 수련의 결과라는 걸 알았다.
첫 소설집 첫머리에 실린 단편 「노을」은 그런 담금질 속에서 나온 밀도 높은 수작이다. 단편이 갖추어야 할 모든 미덕이 다 들어있다고 느꼈다. 다른 작품들은 이 「노을」의 밀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즐겁게 읽히며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도 알심 있게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구성을 매우 중요시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을 수없이 연구한 것 같다. 묘사력도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동행」의 도입 부분은 순은의 예술품을 보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솜씨를 주목해 읽으면 문장에도 오랜 수련의 내공이 느껴진다. 이런 미덕을 지닌 소설이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마저 느끼게 해주었다면 이 작가의 소설은 일단 성공한 것이 아닐까?
강명희 작가의 소설에는 히말라야의 이미지가 있다. 그가 전통을 중시하고 아버지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은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마음과 통하는지 모른다. 라다크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말하는 ‘오래된 미래’의 삶에 대한 가치 말이다.
실제로 히말라야 트레킹에 다녀온 이야기가 소설에 나오지만 라다크 사람들이 오랜 전통으로 지닌 미덕을 그들 자신의 자존감으로 다시 살려내듯이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가 버리고 돌아선 과거와 잃어버린 가치를 돌아보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IS 테러대원으로 자원해가면서 그 이유 중 하나를 페미니스트가 싫어서라고 말했던 만큼은 분명 아니지만 작가는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스스로 노력하여 주체로 선 여성 주인공까지 그 자신의 가치 기준이 아버지다. 이를 과거로의 퇴행이라 할까, 현실 긍정이라 할까.
그의 소설에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여 맹목으로 질주한 주인공이 어느 순간 자기 삶의 허위를 발견하고 스스로 성공가도에서 돌아서서 뒤를 보는, 뜨거운 생의 반환점이 있다. 작가는 이 소위 행복이라는 꼭짓점에서 만나는 절망을 문제 삼는 소설을 여럿 썼다. 그 절망은 우리 삶의 본질에 어떻게 닿아있을까?
이번 소설집은 작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작가의 내면이 보다 드러났다고 본다. 첫 번째 소설집과 두 번째 소설집의 작품들은 그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두 번째 작품집은 첫 번째의 그것에 비해 지향점에서 어떤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든가 개발로 인해 얻어진 부가 가족을 해체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라든가 구세대의 몰락을 주로 다루고 있는 점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농경사회의 공동체가 가지는 덕목과 풍속이 향수를 머금고 묘사되며 사라진 것들에 대한 동경은 구원의 형식을 갖추고 ‘오래된 미래’로 제시된다.
이번 소설집에는 가족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그 중 노인문제가 심각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노인의 비참한 현실은 무너진 윤리와 도덕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 고령화 사회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가족이 노인을 책임지는 단계는 지났기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삶의 터전을 이룩했던 농민 아버지세대가 아파트 개발로 나온 보상금을 둘러싸고 벌이는 가족의 추태에 절망하거나 형제끼리의 불화를 통해 가족이 해체되는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는데 노인을 하나의 장치로 배치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버리지 않고 불러들이는 주요 소설적 장치 중 하나는 낭만적 사랑의 꿈을 보여주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도 이 작가가 불러내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이 비정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수없이 배신당한 누더기 같은 영혼들은 작가가 연출하는 눈물 젖은 사랑을 거부하지 못한다. 이 사랑은 또한 작가에게 무엇인가.
삶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언어와 실재하는 현실은 언제나 서로 다른 층위에 있으며 그 간극은 필연적이다.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언어는 지나치게 희박하고, 어렵게 찾아진 언어는 오해와 오독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들뢰즈의 문학기계』책머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현실, 자명성의 권력에 가려 은폐된 맹목의 현실에 있다. 권력은 언제나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고정하려고 하고 그 안에 개체들의 활동을 포섭하고 통합하려고 한다. 작가는 이 은폐된 맹목의 현실을 뒤집어 보는 자이고 다른 종류의 삶을 창조하고 다른 종류의 삶을 쓰는 자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세월호 이후 나는 시민인가 고민해왔다는 사회학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인 공동체는 없다’고 한다. 세월호나 몇 해 전의 서초동 산사태 당시 시민들이 보여준 방관과 국가의존주의, 땅콩회항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갑질 논란, 이삼 일 사이를 두고 돈 때문에 일어난 엽총 살인사건, 보험금 노리고 제초제로 두 남편과 시어머니를 살해한 여자 등 물신주의 사회의 살벌한 사건 기사가 연일 신문 사회면을 뒤덮고, ‘김영란법’ 통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아 온 날들이 부끄러움 곧 너의 얼굴이라 말하는 것 같다. 샤를리 압도의 테러, IS대원에 지원하는 여학생, 서구와 일본인 참수 동영상……. 이 위에 작가가 말하는 아버지의 질서를 오버랩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질서를 존중하다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는 ‘훌륭한’ 아버지다. 권력이나 명예를 일컫는 그런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 자립정신, 검약정신으로 적지 않은 땅을 사 모은 자수성가형 아버지에다 자식들에게 사랑도 고루 나눠준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갖춘 그런 아버지(「마른장마」, 「서른 개의 노을」)다.
우리 소설사에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의 자리에 오히려 어머니가 크게 자리한 것이 우리 문학사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아버지를 긍정적으로 그린 것을 주목하게 된다.
「마른장마」의 주인공 ‘나’는 가뭄이 계속 되는 여름, 어머니 3년 상을 맞아 친정 동기들과 함께 산소에 간다. 아들을 기다리는 집에서 언니에 이어 둘째딸로 태어난 데다 키도 작고 못생겨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는 스스로를 개망초 같다고 생각한다. 땅이 워낙 많아 딸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기는 했지만 본래 아버지는 딸들에게 땅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일찍 명퇴를 하게 되어 뭔가 해보려고 애를 쓸 때 아버지가 불러 “마음대로 해라. 만일 네가 저 벌판 땅을 다 팔아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해 주겠다. 그러니 너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해서 ‘나’는 벌판의 땅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땅에 대해 욕심이 없다.
아버지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운 딸들은 텃밭을 갖고 채소를 잘 가꾸어낸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남편을 잃은 여동생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다가 남동생이 어머니를 노인 병원으로 보내려고 하자 집에 모셔다 병들고 치매까지 걸린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돌본다. ‘나’는 그 대신 어머니의 집을 여동생에게 반이라도 주자고 말했다가 거절당해 형제들과 어색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3년 만에 만난 형제들은 성묘를 마치고 여동생이 무더운 비닐하우스에서 말아주는 열무국수를 나누면서 차츰 마음이 열린다. 베이비시터를 하며 가장 어렵게 사는 여동생이 잘사는 오라비에게 오이지며 참외며 싸주자 ‘나’도 딸네 주려고 땄던 채소봉지들을 남동생에게 준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농부의 마음이 돈으로 사이가 벌어진 형제의 우애를 살려낸다. 그 마음은 검둥이도 새끼들에게 젖을 고루 먹이려고 몸을 뒤채는 것을 보라며 아버지가 가르쳐 준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마침 비가 내리 퍼붓는다. 작가는 마른장마가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서른 개의 노을」도 아버지의 질서를 소중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씨 집안의 종손은 TV 방송국의 드라마연출 피디였다. 종가에서 자란 그는 종가에서 종손으로 책정이 되자 기꺼이 피디 자리를 내놓고 귀향한다. 그의 아버지는 고속도로가 남으로써 선산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목을 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른 사람이 종손으로 책정되어 종가에서 나와야 했던 그는 성공한 드라마피디로 일하다가 문중에서 다시 부르자 내려간 것이다.
어느 날 주인공 ‘나’는 종손체험을 온 옛 동료로부터 윤작가가 쓴 소설이 실린 잡지를 받는다. 이런 액자 속에 윤 작가가 쓴 <서른 개의 노을>이 내화로 들어선다. 종가란 두말 할 것 없이 아버지의 문화다. 심윤경의 『달의 제단』에서 조선조에서부터 이어진 종가의 비인간적 실상이 그려졌지만 이 「서른 개의 노을」에서 종가는 하나의 전승해야 할 문화로서 그려진다. 또한 내화의 <서른 개의 노을>에서 할아버지는「마른장마」의 아버지처럼 검약과 근면으로 집을 일으켜 세우는 인물이다. 가족들에게 보리밥과 밀장국으로 끼니를 잇게 하면서 쌀을 모두 내다 팔아 땅을 산다.
그런데 종손이 되는 이피디나 땅을 사는 할아버지가 이런 선택을 하는 진정한 계기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윤작가와의 사랑이 더는 뒤로 물러 설 여지가 없게 되자 이피디는 종손의 자리로 내려갔고, 연모하는 남자가 사는 마을의 길옆에 평상을 내놓고 할아버지만 바라며 사는 여성에게 그 여자가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벌판의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사랑을 표했다는 설정은 아버지의 질서, 곧 가정은 지켜져야 한다는 전통적 윤리 위에 서있는 것이다. 작가는 종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따르는 것보다 고귀한 것이며 이 아버지의 질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렇게 각자의 가정 지키기라는 매우 건전한 논리와 도덕은 실은 물신주의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가족해체까지에 이르고 있다(「폭염주의보」).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그리는 농촌 공동체의 아름다운 삶은 돌이킬 수 없기에 그것은 향수를 머금고 추억된다. 설이 가까워 오면 무구덩이를 헐어 나박김치와 깍두기를 담그고 맷돌을 돌려 두부를 하고 싸라기로 엿을 고았다. 이런 작업에는 아버지 삼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 흥성거리는 시간을 함께 한다.

엿 고는 날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잔칫날이었다. 아이들은 환하게 불을 밝혀둔 집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추위도 잊은 채 밤새 놀았다. 여자들은 수증기가 자욱한 부엌에서 불의 양을 조절해가며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었다.
엿 고는 구수한 냄새에 아이들은 부엌을 들락거리며 목이 빠지게 엿이 고아지기를 기다렸다. 엿이 얼추 고아져 거품이 크게 일어나면 성급한 아이들은 종지에 조청을 퍼서 조갈이 나도록 먹었다. 손바닥만 한 거품이 쩍쩍 일어나 가마솥 안을 채우면 엿은 알맞게 고아진 것이다. 그러면 그릇마다 쟁반마다 콩가루를 깔고 달인 엿을 양푼으로 펐다.
쟁반에 퍼 놓은 엿이 굳어 가면 여자들이 빙 둘러 앉아 얇게 늘였다. 두 손바닥만 하게 늘린 엿은 서로 붙지 않게 콩가루 속에 박아 함지박에 담았다. 그 함지박을 다락에 얹어 두면, 정월 내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오르내리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작가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시기를 묘사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이미 사라진 환영에 불과하다. 「리모컨」은 그런 점에서 살펴볼 만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큰형의 손에 자라 형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여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이룬다. 아들은 의과대학에 다니고 아내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5년이나 잘 모셨다. 흠 잡을 데 없는 나의, 아니 아내의 행복을 보며 ‘나’는 그 행복이 내던져질 것을 상상한다.
‘나’의 어머니는 “미친년 화냥년 남편 잡아먹은 년”이었다. 아이들로부터 놀림 받는 어머니로부터 형들은 ‘나’를 격리하여 키웠다. 그 어머니는 ‘나’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것은 아내의 행복에 겨운 얼굴과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고 퇴역하는 동기생을 보면서였다.
잊고 있었던 어머니를 천한 여자이발사에게서 만난 ‘나’는 그 여자의 도발에 빠져든다. 이 소문으로 ‘나’는 진급에서 탈락하고 퇴역한다. 아내는 천한 여자와의 외도를 막지 못하자 어머니를 큰형 집으로 되돌리고 나를 외면한다. 천한 여자는 같이 살자는 간청에도 무능한 ‘나’를 조소하며 떠난다. ‘나’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둘째형 집을 찾아가서 어머니와 치사량의 약을 먹고 나란히 눕는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질서는 형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과부이자 정신이상자인 그리고 화냥년인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아버지의 질서에서는 정조를 잃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과부는 남편 잡아먹은 여자인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나 어머니는 정신을 놓은 미친년이 되었다.
이런 어머니는 삶에 장애일 뿐이기에 철저히 격리하여 동생을 키웠고 동생은 그런 형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질서 속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그런 ‘나’는 위에 언급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어머니와 같은 천한 여자 속에서 어머니를 본다. 부끄러운 어머니에게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 여자마저 떠나자 ‘나’는 어머니를 찾아가 함께 자살을 기도한다.
이 마지막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천한 여자 속으로 들어간 것은 어머니에 대한 속죄의 의미였으며 천한 여자와의 관계가 실패함으로써 자아는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는 해석이 그 하나이다. 또는 ‘피는 어쩔 수 없다’는 대목처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느 쪽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비슷한 구조의 「벼랑 끝의 남자」의 주인공은 팜므파탈이라 할 여자를 거부하면서도 빠져들어 파멸의 길로 떨어져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리모컨」의 경우 팜므파탈에 해당할 천한 여자 이발사는 그와 다르다. 주인공에게 어머니를 보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자아 찾기에 도움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어쨌든 작가는 아버지의 질서를 존중하는 쪽에 선다. 어머니에게 돌아가 약을 먹고 나란히 누워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작가의 아버지의 질서에 심정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어느 멋진 하루」를 들 수 있다. 주인공 ‘나’는 차를 새로 뺀 김에 부모에게 자랑도 할 겸, 본가에 가려고 했으나 아내에 이끌려 처가엘 먼저 가게 된다. ‘나’는 오이꽃도, 닭도 수컷의 쓸모가 암컷만 못하다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자로서의 자기정체성에 위기를 느꼈던 모습이 이어진다. 고교시절엔 남녀합반을 하자 남학생 학부모가 시위를 했다. 남녀합반을 하면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로 내신이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명문대에 들어가니 과의 반이 여학생, 군대에 다녀오니 여학생들이 사법고시에 턱턱 붙고 있다. 그런 여자들이 무서워 교원임용고시로 진로를 바꿨는데 겨우 합격하여 발령 받아 가보니 몇몇만 빼고 전부 여교사였다.
아내가 아들을 둘 낳으면서 가까스로 나를 낳은 어머니와의 기 싸움은 끝난다. 여왕벌-‘나’는 아내를 여왕벌이라고 부름으로써 당당하지 못한 수컷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다- 같은 아내 곁에서 잘 하는 것이라곤 오직 애 보는 것 한 가지인 내가 그저 이렇게 사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나’는 마음을 달랜다. 아버지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따라 읽게 되므로 제목 「어느 멋진 하루」는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재와 팜므파탈

「노을」의 안자는 4·3사태의 희생자로 정신이상이 된 여자다. 정신을 놓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감나무 아래서 눈을 떠 그 빈집에 들어 산다. 어느 날 벙어리처럼 찾아든 영감은 실은 집주인으로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생명인데 채 죽기도 전에 아내와 자식들이 재산을 놓고 다투어 언론에까지 보도되자 집을 나와 제주도로 왔다. 두 상처받은 영혼은 풍요한 자연과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월한 외딴 공간에서 마지막 시간을 노을로 승화시킨다. 무욕의 안자를 만나 상처를 치료받고 세상을 떠나는 영감의 마지막 모습은 연인의 모습으로 손색이 없다. 이를 어찌 낭만적 사랑 운운할 수 있으랴. 인간의 승리요 고통의 승화다.
강명희 작가의 소설에는 사랑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소설집에서는 이 「노을」 외에도 「샴페인」, 「마지막 인사」에 사랑이 나오고, 이번 소설집에서는 중편 「약속」과 단편 「서른 개의 노을」에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서른 개의 노을」에 나오는 종손으로 살기라든가 할아버지의 집안 일으키기가 모두 사랑과 관련한 것이었음은 살펴본 바와 같고 이 이야기는 바로 아버지 질서의 도덕에 준한 이야기임도 사랑임도 확인되었다. 중편 「약속」역시 작가의 사랑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가 그리는 사랑의 완성이 모두 노년에 이르러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발견한다. 중세 시대의 숙명적 사랑을 보는 듯하다.
중편 「약속」은 연애 이야기이다. 주인공 서영진은 상현과 사귀던 중 상현의 친구 윤경민을 만나 열병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상현에게 상처를 주고 영진과 결혼한 경민은 상현에게 영진을 행복하게 해주리라 한 약속을 지켜간다. 뜻밖의 교통사고로 전신마비의 장애자가 된 경민은 더 이상 영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게 되고 오히려 짐이 되었다. 영진에게 가족의 생계마저 책임지우고 있다. 삶에 지쳐가던 영진은 우연히 지인상을 만나고 그 역시 이혼으로 상처를 입은 상태라 둘은 금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진이 지인상과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본 경민은 영진을 놓아주기로 결심하고 지인상에게 영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라 하고 휠체어를 굴려 장애의 삶을 끝낸다. 이를 계기로 영진은 사랑의 열병에서 깨어나 가족을 지키고 교사로서 가야 할 길을 간다.
한편 지인상도 영진의 남편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유보한 채 영진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불행한 아내를 데려다 가정을 이루나 아내는 병으로 죽고 히말라야로 의료봉사를 하며 지나는데 영진이 교장으로 정년퇴임하는 날 둘은 만나 드디어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 연애 이야기는 무척 도덕적이다. 이 연인들은 아버지의 질서를 교란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헌신적 책임을 다하고 삶의 황혼에 이르러 더 이상 사랑이 죄가 되지 않을 때 만나 경민에게 한 약속을 지켜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 이때 그들의 연애는 비현실적이다. 작가가 그린 것은 그러니까 사랑이 아니라 약속인 것, 아버지 질서의 아름다움을 그린 셈이다.
경쟁 사회이자 물신사회인 이 신자유주의 시대 비인간화의 대안으로 작가는 신고전주의적 아버지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이야기 솜씨는 작은 혁명의 기미를 물고 있다.
그러나 경쟁사회와 물신주의 사회 역시 아버지의 질서에서 나온 산물이고 모순일 때 이는 환원적 논리라는 모순을 갖고 있다. 과거로의 퇴행인지 현실 긍정인지 어머니가 부재한 작가의 소설세계에서 팜므파탈의 존재를 곰곰이 되새겨 보는 이유다(「벼랑 끝에 선 남자」).

저자소개

김포에서 태어나 자라 김포여중을 나왔다. 고등학교는 인천으로 유학을 가서 인일여고를 졸업했다. 작가는 인천이란 도시에서 세상에 대해 알아갔고 그 영향으로 첫 번째 소설집 『히말라야바위취』에 실린 작품 반 이상이 인천을 배경으로 쓰였다.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진학해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국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전업한 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벼랑 끝에 선 남자」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첫 번째 소설집이 히말라야바위취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이번 두 번째 소설집『서른 개의 노을』은 돈과 욕망으로 마른장마처럼 황폐해가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농업집약적 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농경사회에 애정을 갖고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해체되는 가족관계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려냈다. 작가는 현재 소설가협회와 숙명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글지문학회 동인이다.
E-mail: kang7355@hanmail.net

목차

동행
어느 멋진 하루
서른 개의 노을
폭염주의보
벼랑 끝에 선 남자
마른장마
리모컨
약속

서평 | 아버지의 질서를 꿈꾸는 천의무봉 이야기꾼
- 서정자(문학평론가·전 초당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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