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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운명의 교차점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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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운명의 교차점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김동인 
  • 출판사문학일독 
  • 출판일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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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수없는 인명과 수없는 재물과 수없는 인류의 보화를 삼키고 세계 대전쟁이 종식이 되었다.
일본도 이 전쟁에 참가는 하였다 하나 겨우 동양의 한구석 교주만 근처에서 퉁탕거려보고 의리적으로 불란서 전선에 군대를 약간 보내본 뿐이라 재정적으로 손해가 극히 적었다.

그 대신 이 전쟁 때문에 얻은 이익은 지극히 컸다. 지금껏 온갖 약품이며 기계를 독일에서 수입하던 것이 독일과 국교 단절을 한 관계상 자작자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과학계의 발달이 놀라웠다. 유럽에서는 전쟁으로 덤비느라고 일용품조차 제 나라에서 만들지 못하는 관계상 미국이며 일본등에 주문하여다가 쓰게 되니만치 무역상의 이익이 놀랍게 되었다. 해운으로 굴러 들어온 돈도 막대하였다. 위체 관계로 얻은 이익도 막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적지 않은 이익의 반면에는 손해도 또한 없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주의의 흥성과 사치 이것이 가장 눈에 뜨이는 악영향이었다.
--- “선구녀” 중에서

황 서방이 사는 ○촌은, 그곳에서 그중 가까운 도회에서 570리가 되고, 기차 연변에서 300여 리며, 국도에서 150여 리가 되는, 산골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금년에 40여 세 난 황 서방이, 아직 양복쟁이라고는 헌병과 순사와 측량기수밖에는 못 본 만큼, 그 ○촌은 궁벽한 곳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곳에서 10리 안팎 되는 곳은 모두 친척과 같이 지내며, 밤에 윷을 서로 다니느니만치 인가가 드문 마을이었다. 산에서 범이 내려와서 사람을 물어 갈지라도, 그 일이 신문에도 안 나리만치 외딴 곳이었다. 돈이라는 것은 10원짜리 지전을 본 것을 자랑 삼느니만큼, 그 동리는 생활의 위협이라는 것을 모르는 마을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동리는, 순박하고 질구하고 인심 후하고 평화로운 원시인의 생활이라 하여도 좋은 만한 살림을 하는 마을이었다.
이러한 ○촌에, 이즈음 뜻도 안 하였던 일이 생겨났다.
○촌에, 이즈음, 소위 도회 사람이라는 어떤 양복쟁이가 하나 뛰어들어왔다. 그 사람은 황 서방의 집에 주인을 잡았다.
--- “시골 황서방” 중에서

저자소개

호는 금동琴童, 춘사春士.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학교인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일본 유학 중 이광수(李光洙), 안재홍(安在鴻) 등과 교제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24년 폐간된 [창조]의 후신 격인 동인지 [영대]를 창간했다.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삼천리]에 「광염 소나타」를 발표했다. 1932년 [동광]에 「발가락이 닮았다」, [삼천리]에 「붉은 산」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조선일보에 학예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1935년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 친일소설「성암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을지문덕』과 단편「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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