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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속에서 피어나다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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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속에서 피어나다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김동인 
  • 출판사문학일독 
  • 출판일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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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학동(五鶴洞)은 이씨촌(李氏村)이었었다.

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서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뒤 그때의 그 조상부터 십 오륙대가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리를 이루고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의 안해들로써 커다란 말을 이루었다.

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舞龍)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그 무룡재와 말령은 오학동에서 오 리쯤 남쪽에 가서 겨우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를 이만치 벌어지고 오 리쯤 북으로 가서는 서로 합하여서 만약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 볼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묏마루에 있는 한 구렁텅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오학동과 그 근방 일대 -무룡재와 말령에 둘러싸인- 를 가리켜 ○○골이라 하였다. 여자의 생식기를 따서 붙인 그 골짜기의 이름은 모양으로 보아서 그럴듯하였다.
--- “잡초” 중에서

5년 전 이맘때였다. 김장을 겨우 끝낸 뒤쯤이니까.
우리 집에는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큰방과 건넌방 밖에, 비워둔 뜰아랫방이 하나 있다.
도대체 사글세를 주면 귀찮고 시끄럽고 집 더러워지는 위에 만약 불행히 술 먹는 사람이라도 들게 되면 그야말로 집안이 꼴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영향이 되겠는지라, 우리는 빈방이 있을지라도 사글세를 놓지를 않았다. 한 달에 단 몇 원과 바꿀 수 없는 무형적 손해가 많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해따라 웬 까닭인지 아내도 사글세를 놓아볼 생각이 났었고, 나도 또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승낙을 한 것이었다.
--- “가두” 중에서

저자소개

호는 금동琴童, 춘사春士.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학교인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일본 유학 중 이광수(李光洙), 안재홍(安在鴻) 등과 교제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24년 폐간된 [창조]의 후신 격인 동인지 [영대]를 창간했다.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삼천리]에 「광염 소나타」를 발표했다. 1932년 [동광]에 「발가락이 닮았다」, [삼천리]에 「붉은 산」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조선일보에 학예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1935년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 친일소설「성암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을지문덕』과 단편「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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