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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낙랑 공주, 순정의 호동 왕자 - 고구려 대무신왕 때 영토 확장 정책이 담긴 설화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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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낙랑 공주, 순정의 호동 왕자 - 고구려 대무신왕 때 영토 확장 정책이 담긴 설화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윤백남 
  • 출판사노느매기 
  • 출판일20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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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맛깔스런 소설 속에서 역사적 진위를 찾아보기”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의 이야기는 야사로 전해진 이야기, 즉 야담 혹은 설화이며, 이를 바탕으로 좀더 재밌게 소설로 꾸민 작품이다. 《삼국사기》의 간략한 이야기와 달리 구구절절한 두 주인공의 감정과 행동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만큼 감동을 준다.
<정열의 낙랑 공주>는 호동이 계략적으로 낙랑 공주에게 접근하여 결혼을 하고, 낙랑 공주에게 자국 신기인 자명고와 자명각을 부수도록 요구한다. 오직 사랑만을 갈구하며 기다리던 낙랑 공주는 호동 왕자의 아내로 인정받기 위해 낙랑국의 신기를 부수었다. 결과는 자국 멸망과 죽음이었다.
<순정의 호동 왕자>는 낙랑군 정벌 성공과 낙랑 공주 죽음 이후 호동 왕자의 심적 고뇌와 태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지배층의 암투를 다루었다. 제목처럼 이야기는 권력 싸움보다는 호동 왕자의 후회와 낙랑 공주를 향한 순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 초기 세력 강화를 위해 영토 확장 정책에 힘쓴 아버지 대무신왕의 뜻에 기여하기 위해 낙랑국 정벌에 앞장섰지만, 결국 사랑을 배신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호동 왕자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다. 호동 왕자가 낙랑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고 단지 낙랑국 정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뿐이라든가, 낙랑국 정벌 후 왕후와의 권력다툼에서 패해 죽음으로 몰렸다든가, 대문신왕이 낙랑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후 낙랑국에 보내 신기를 망가뜨리도록 종용했다든가 등등.
이런 무수한 추측들은 고구려 초기 역사적 사실과 맞물려 한 번쯤 그 진위를 소설 속에서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짧은 소설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은 어떠할지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_읽기 편한 문체, 70여 개의 어려운 낱말을 주석으로!”
내용도 복잡하지 않고 문체도 단문 위주로 쉽게 쓰인 소설이다. 간혹 옛말과 한자어, 방언이 나와 읽기 어려울 수 있으나, 이런 단어는 주석으로 달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단숨에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동 왕자 설화를 이야기하면서 고구려 초기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저자소개

1888~1954. 한국의 소설가, 극작가, 연극 영화인. 본명은 교중(敎重), 기타 미봉(眉峰), 태백남인(太白南人) 등. 충남 공주 출신.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1903년 한성부로 올라와 경성학당 중학부 졸업,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6년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 예과 졸업, 1910년에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11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했다,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신파극 극단인 문수성을 창단하여 번안 신파극을 공연하고 배우로도 활동했다. 잡지사 반도문예사를 설립하여 월간 잡지 ‘예원’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입사하였고, 매일신보에 단편소설 ‘몽금’을 발표하였다. 연극론과 희곡을 발표하고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촬영했다. 윤백남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으며, 민중극단 배우였던 이월화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영화 ‘운영전’, ‘심청전’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자 192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1930년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대도전’이 큰 인기를 끌면서 윤백남은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30년대에는 야담 운동에 뛰어들어 많은 야담 작품을 발표했고, 1934년 10월 월간야담을 창간했으며, 1937년에 만주로 이주해 역사소설을 썼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사변 중 해군 중령으로 복무,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맡고,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 회원을 지냈다. 1954년 9윌 2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연극, 영화,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 문화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장편 역사소설 ‘봉화’, ‘흑두건(黑頭巾)’, ‘해조곡(海鳥曲)’,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 ‘낙조의 노래’, ‘회천기(回天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등과 희곡집 ‘운명’, 저서 ‘조선야담전집’, ‘조선형정사(朝鮮刑政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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