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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의 나무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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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의 나무 - 단편으로 읽는 현대문학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김동인 
  • 출판사문학일독 
  • 출판일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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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창피창피 한대야 나 같은 창피를 당해 본 사람이 있겠나.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도 부끄러울세. 그렇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창피는 다시 한번 당해 보고 싶기도 하거든.
이야기할께. 들어 보게.
오년 전, 육 년 전, 칠 년 전인가. 어느 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혈기 하늘을 찌를 듯하던 젊은 시절일세 그려. 지금은 벌써 내 나이 삼사십. 얼굴에는 트믄트믄 주름자리까지 잡히었지만 이 주름자리도 없던 젊은 시절.
--- “어떤날 밤” 중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0여 년이라는 최 서방의 생애는 몹시 단조하고도 곡절 많은 생애였다. 여남은 살에 어버이를 다 여의고 그때부터 그는 독립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촌집 머슴으로서, 도회의 자유노동, 행랑살이, 그러한 유의 온갖 직업에 손을 안 대본 적이 없었다.
정직한 이는 하느님이 아신다 하지만, 최 서방의 존재는 하느님도 잊어버렸다. 부지런한 자는 성공함을 본다 하지만, 최 서방의 부지런은 그의 입조차 넉넉히 치지를 못하였다.

유랑에 유랑,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최 서방의 생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이었다.
도회 친구들은 그의 너무 솔직함을 웃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에는 5할의 부정직함과 5할의 비위가 있어야 한다 함을 가르쳤다. 그것이 영리함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도 그것이 진리임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삶은 살 수가 없었다. 그러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까지 해보았으나 못하였다. 얼굴이 뜨거워오며 스스로 속으로 불유쾌하여 할 수가 없었다.
--- “포플러” 중에서

저자소개

호는 금동琴童, 춘사春士.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학교인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일본 유학 중 이광수(李光洙), 안재홍(安在鴻) 등과 교제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24년 폐간된 [창조]의 후신 격인 동인지 [영대]를 창간했다.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삼천리]에 「광염 소나타」를 발표했다. 1932년 [동광]에 「발가락이 닮았다」, [삼천리]에 「붉은 산」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조선일보에 학예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고 1935년 월간지 [야담]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 친일소설「성암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을지문덕』과 단편「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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