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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웅 안중근 -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다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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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웅 안중근 -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다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전우용 (지은이) 
  • 출판사한길사 
  • 출판일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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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민족의 영웅 안중근』은 ‘안중근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 저자 전우용은 우리 시대의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 현안에 대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역사학자다. 그는 한국인들의 의식에 담긴 ‘근대적 개념어’에 관해 연구하면서 이를 활용해 시대를 뛰어넘는 선구적 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바로 안중근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 책에서 그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기반을 마련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했는지 세밀하게 분석한다.
제1부는 안중근의 삶에서 신화를 모두 걷어내고 그의 일생을 가감 없이 소개한다. 제2부에서는 안중근의 사상을 분석하고 그가 사형 직전에 저술한 동양평화론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제3부는 안중근의 의거 직후 벌어진 사건들과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보여주며 안중근의 사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을 시사한다.

애국하는 뜨거운 성품을 지닌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자서전에 최초로 ‘역사’라는 제목을 붙인 선구적인 인물이다. ‘역사’라는 개념이 널리 정립되기 이전에 그 뜻을 깨닫고 자서전에 『안응칠역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역사’에서 사(史)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뜻하며 ‘히스토리’(history)의 핵심 가치 또한 ‘교훈’이다. 18세기 중엽 이후 독일어에서는 ‘게쉬히테’(Geschichte)가 ‘히스토리’ 대신 쓰이면서 ‘자체의 운동 원리와 지향점을 가지면서 개개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에 가까워졌다. 일본인들은 ‘게쉬히테’를 ‘역사’로 번역했고 박영효가 이 개념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때 사람들은 역사라는 단어를 ‘애국하는 뜨거운 성품을 배양하는 신학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안중근은 신문으로 보급된 근대적 역사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애국하는 뜨거운 성품’을 『안응칠역사』에 남기고자 한 것이다.

1879년 황해도에서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천주교에 입당하고 가문의 몰락을 지켜보는 등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중국에 머무는 중에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안중근은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 무렵 고종의 폐위 소식을 들은 그는 김달하의 권유에 따라 우리 동포들과 함께 의병투쟁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에 간다. 그는 청년회에 가입해 임시사찰 직책을 맡았고 사람들을 만나 망국을 막기 위해 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포들에게 함께 의병에 투신하자고 설득해 의병부대를 조직한다. 1908년 동의회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일본군의 초소를 급습한다. 안중근은 일본군 5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우리가 서로 목숨 걸고 싸우게 된 것은 이토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훈계하며 포로들을 풀어준다. 그러나 안중근 부대는 풀려난 일본 병사들의 역습으로 일본군 추격대의 기습을 받아 많은 동지들을 잃게 된다. 부대는 급속도로 와해되었고 안중근은 동포들의 비난 섞인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동지들에게 진 목숨 빚을 갚기 위해 1909년 ‘동의단지회’를 결성한다. 그들은 ‘대한 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왼손의 약지를 잘라 태극기에 혈서를 써 맹세한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하면 동포들의 민심을 단합하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유동하·조도선과 함께 이토의 동선을 파악해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두 발은 가슴에, 한 발은 복부를 쏘아 이토를 사살한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화자일보』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마다 명중했다.”_107쪽

안중근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어머니 조마리아의 뜻을 따라 감옥에서 죽음을 준비한다. 그는 옥중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일본 간수들을 놀라게 했고, 그 모습에 감격한 간수들이 휘호를 부탁하며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때 정립한 제국시대 약소민족의 보편적인 염원을 담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0년 뒤에 발표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토대가 된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안중근 사상의 핵심 가치인 정의·인도·동포애를 담고 있으며,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유지되고 있다. 안중근의 생각은 여전히 우리 국민들끼리의 약속인 헌법에도 남아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세기를 앞선 실천적 선구자

격동기를 살았던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당시 33세였다. 그는 집에서 한학을 배웠지만 근대 교육은 받지 못했고 책을 읽는 것보다 승마와 사격을 즐겼다. 안중근이 어려서부터 마음 깊이 새긴 소양은 기개·호방·의협심·용맹과 같은 무인의 가치였다. 그런데도 그는 동양의 사상과 천주교의 교리, 자신의 성찰을 반추하면서 주체적으로 동양평화론을 정립했다.
안중근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천인감응설을 이용했던 초기 천주교 선교사들을 따라 그 뜻을 받아들였다. 또한 천주교로 유교를 보완한다는 보유론의 관점에서 군주에 대한 충의와 천주에 대한 신앙을 하나로 연결했다. “하늘(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펼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그에게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가 하늘의 뜻에 반하는 죄를 저질러 그를 벌하는 것이 천명을 따르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의거 전날 밤, 안중근은 굳은 결의를 다지며 붓을 들어 「장부가」를 썼다. 그는 감옥에서 200여 점에 달하는 휘호를 썼다고 전해진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 도적 이등(伊藤)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 헤아렸으리오 세상일이 본래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어서 빨리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로다._263쪽

안중근은 민족주의의 선각자들과 교유하면서 민족이 살아 있는 한 국가는 언제라도 소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나누었다.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협력해 ‘동아시아공동체’(EAC)를 이루는 동양평화를 구상했다. 그가 생각하는 인민은 “정부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을 만들어낸 유럽통합론과 유사하다. 유럽인들은 8세기 초부터 유럽을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생각을 빼닮은 유럽 평화체제는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기를 앞선 그의 ‘선구성’은 피압박 민족이었던 실천적 지식인의 체험과 성찰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동아시아 연대의 상징 안중근

우리 민족은 내부적으로 ‘이념 대립’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진보와 보수를 따지지 않고 안중근을 기렸다. 김원봉을 비롯해 대다수 독립운동가가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다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안중근은 북한에서도 영웅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은 ‘민족 통합의 상징’이다. 안중근은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 러시아에도 안중근에 관한 기념물이 있고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안중근을 위인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중근은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동아시아 연대의 상징이다.

의거 직후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광인’으로 비하하며 이토의 사망을 한국 병합의 기회로 삼기 위해 이토의 공적을 부풀렸다. 한국인들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태도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 고관과 친일파 중에는 이미 나라가 망할 것을 예상해 이를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으려는 자가 많았다. ‘국민사죄단’을 조직해 일본에 파견하자는 무리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이토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반면에 일반 국민들은 안중근에게 의사 칭호를 부여하며 환호했다. 의거 직후 한국인들이 할 수 있었던 발언은 안중근을 비난하는 것뿐이어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안중근의 유족들이 망명해 생활 근거를 확보한 뒤부터 안중근에 대한 역사를 보존하려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안중근 관련 상품을 만들고 그의 생애를 각색해 연극무대에 올렸다. 이제 안중근은 일본에서도 ‘한국의 의사’로 소개되며 평화주의적 연대를 표상한다. 조국을 넘어 세계평화를 꿈꾼 안중근의 사상을 보전하고 계승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갈등의 고리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1962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인 회사(會社)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서울시 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 근현대의 사회경제사, 도시사, 보건의료사, 일상사, 개념사 등에 관해 두루 연구하면서 『서울은 깊다』, 『한국 회사의 탄생』, 『현대인의 탄생』, 『오늘 역사가 말하다』, 『140자로 시대를 쓰다』, 『우리 역사는 깊다』, 『내 안의 역사』, 『망월폐견』, 『민족의 영웅 안중근』 등의 저서를 냈다.

목차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다 | 책머리에



1부 안중근의 삶

1 『안응칠역사』

2 소년 안중근, 동학군과 싸우다

3 천주교 입교와 복사(服事) 생활

4 나라 구할 길을 찾다

5 의병이 되어 총을 들다

6 장부(丈夫), 영웅이 되다

7 감옥과 법정에서 평화사상을 전하다

8 유족과 독립운동



2부 안중근의 생각

1 가풍(家風)

2 배워서 익히기

3 벗들과 사귀기

4 장부가에 담은 생각

5 동양평화론

6 휘호에 담은 생각



3부 안중근에 관한 생각

1 의거 직후 안중근에 관한 생각

2 일제하의 안중근 기념과 독립운동

3 해방 후의 안중근에 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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