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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잉어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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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잉어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출판사휴머니스트 
  • 출판일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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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삶의 고통이 배어 있는 식탁에 앉아
억지로라도 희망을 삼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바움은 사후에 출간된 회고록 《모두 전혀 다르다》에서 농담하듯 자신을 ‘이류의 일류 작가’라고 부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여성이라는 점과 삶에 밀접하게 닿은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순수문학의 반대편에서 대중작가로 폄훼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대의 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해석 틀과 여성 문학에 대한 관점이 여럿 생겼으며, 1920∼19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받은 압박감을 가장 잘 묘사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바움은 상업주의와 매스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현대 작가의 등장을 예고하기도 했다. 당시 순수문학의 얼굴이었던 토마스 만이 바움의 〈길〉을 상찬했다는 점도 당대 바움이 받았던 불합리한 평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며, 〈길〉에서 날카롭게 보여준 여성의 현실이나 권리는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의 단편들을 연상케 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특별히 대단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잉어〉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먹을 잉어 요리를, 〈굶주림〉의 주인공은 사랑받기를, 〈길〉의 ‘친칸 부인’은 새로운 옷장을, 〈백화점의 야페〉의 소년은 넥타이를 원했을 뿐이다. 언뜻 소박해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소망은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그마저도 찢어진 희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소망 사이를 위태롭게 저울질한다.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식탁
“말리 고모가 도착해서 대형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의 권한을 이양받아야 비로소 빈에서 크리스마스 준비 업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졌고, 모든 것이 변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잉어를 고르곤 했던 시장은 이제 황량해졌고, 잉어는 구경할 수도 없다. 〈크리스마스 잉어〉의 ‘말리 고모’는 적어도 겉으로는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렵게 구한 잉어를 욕조에서 삼 주간 키우기로 하는 등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파티 준비에 열중한다. 그사이 가족들은 잉어에게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잉어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며 전쟁 전, 평화롭던 삶의 상징이 되는데…….
잉어를 잡아야 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작고 연약한 잉어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이 죽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리 고모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며 “왜 죽이지?”라고 소리치는 대상은 작은 욕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는 잉어처럼 보이지만,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들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굶주림〉의 ‘가브릴로프스키’는 전쟁으로 잃은 약혼자에게 받은 스컹크, 새롭게 세 든 집주인의 아들을 거쳐 젊은 의사에게 사랑을 쏟는다. 하지만 젊은 의사는 가브릴로프스키의 신경증 증세를 건드렸을 때 드러나는 징후를 관찰해보려는 가해자에 불과하다. 어느덧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굶어야 할 정도로 궁핍해진 가브릴로프스키는 피아노 교습을 하는 등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점점 위축되고 망상도 심해져 젊은 의사가 무심한 태도로 스컹크를 죽일 때도 분노하지 않으며,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인다.
발작을 일으킨 가브릴로프스키가 집주인 아들 ‘빌리’에게 달려드는 장면은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삶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피아노 교습에서 해고되고 집에 돌아와 “빌리는 내 아이지?”라고 묻지만, 빌리는 “소심하게, 방어하듯, 부끄러워”하며 말없이 먹어댄다. 이때 가브릴로프스키는 삶과 사랑에서 다시 한번 거절당한다. “이상하게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이제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터질 것 같은 심한 압박감 속에서 “또렷하고 끔찍하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음식이 가득한 빌리의 둥근 뺨과 행복하게 씹고 삼키는 아이의 관자놀이 근육”이었다. 삶에서 극히 드물게 포만감을 느꼈던 가브릴로프스키는 “내부에서 무언가 부서져서 밖으로” 토하듯 쏟아낸다. 형태가 있던 음식이 식도와 위를 거쳐 형태 없는 액체가 되듯. 끈질기게 삶의 형태를 만들려고 했던 가브릴로프스키가 게워내는 건 형태 없이 쏟아지는 자신이었다.

행복한 순간이 생길 거라는 식탁
〈길〉에 나오는 친칸 부인의 일상은 자신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부인은 “세 번으로 나눠 식사”를 하는 남편과 아이들의 생활에 맞춰 움직인다. 다림질을 하고, 장을 보고, 깨끗하지 않은 복도도 손수 왁스로 닦는다. 아주 가끔 “조그마한 책장으로 가서 책 한 권을 꺼낼 때가 있지만” 몇 쪽 읽기 전에 잠들어버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하나를 누르고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듣는 것이 자신을 위한 유일한 시간이다. 부인은 “사는 게 힘들다”.
〈길〉에는 구체적인 음식명이 나오지 않고 ‘생선’, ‘빵’ 등으로 적혀 있다.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구겔후프’, ‘자허토르테’ 등 구체적인 음식명이 많이 나오고 레시피도 꽤 자세히 적혀 있었던 걸 떠올린다면 그 대비는 좀 더 명확해진다. 〈길〉에서 음식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꼭 필요한 에너지의 역할만 할 뿐 정서적인 풍요로움은 결여되어 있다. 심지어 친칸 부인은 이런 필수적인 일상에서도 소외된 것처럼 보인다. 부인에게 남은 건 가사노동자로서 책임감이 전부다.
점점 고립감에 빠지는 친칸 부인이 골몰하기 시작하는 건 옷장이다. 제대로 된 옷장을 구하기만 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 믿는다. 친칸 부인은 새로운 옷장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꾼다.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적당한 가격과 원하는 수납력을 갖춘 옷장이 경매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심하게 비를 맞은 탓인지 감기에 걸려 앓아눕고 마는데…….

“못 이룬 꿈, 어머니, 못 이룬 꿈뿐이에요.” 그녀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53쪽)

친칸 부인이 원하는 삶과 실제 삶에는 크나큰 간격이 있다. 부인은 “삶이라는 협소하고 미비한 감옥에” 갇혔다. 가득 차서 언제든 터져버릴 것 같은 옷장과 삶에 갇힌 자신을 동일시한다. “전부 실패”라고 중얼거리며 감옥 같은 삶에서, 가득 찬 옷장에서 벗어나려 한다.

〈백화점의 야페〉의 주인공 ‘야페’는 “너희는 그렇다! 인생이 너희들한테는 달콤하고 기름지고 마치 버터처럼 매끄럽다”라고 절규한다. 그는 우연히 백화점에서 본 넥타이에 온 마음을 빼앗기지만 아무리 돈을 모아도 결코 살 수 없음을 깨닫고는 몰래 숨어들어 훔쳐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넥타이만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두운 밤 백화점에서 본 건 자신이 꿈조차 꿔본 적 없는 수많은 상품과 식료품들의 범람이었고, 야페는 폭주하기 시작하는데…….
야페는 대량생산을 통해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과거에 그를 유리창으로 차단했던”이라는 문장을 통해 이런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몰래 들어간 백화점에서 “실크 양말이라니, 사람들이 정말 미쳤구나!”와 같이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뒤지며 내뱉는 탄성은, 마네킹을 따라 취해보는 포즈와 대사는, 야페 자신도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읽힌다. 하지만 야페가 갈망하는 삶과 실제 삶의 크나큰 간격에서 느끼는 건 어지럼증이다.
치통은 이런 “극히 이상했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통증이 점점 심해져 치아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야페는 먹는 행위에서 멀어진다. 아마 야페는 적절한 때에 치과 치료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치통은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을 키워 자신을 몰아가는 삶의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비극적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지른 불이 야페를 무섭게 따라올 때, “눈썹, 속눈썹이 그을었고 피부는 탄 자국과 물집 천지”였을 때, 치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의미심장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항상 떠오를,
황홀하게 끓어넘치다 어느새 비감이 찾아드는 소설


《크리스마스 잉어》에는 비유와 은유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못 이룬 꿈뿐이에요”, “나는 당신한테 모든 걸 바쳤어” 등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이렇게 직선주로를 달려온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다. 한은형 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어떤 예감이 들었다. 황홀하게 끓어넘치다 어느새 비감이 찾아드는 이 소설을 읽은 이상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 잉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 이는 정확한 감상처럼 느껴진다. 너무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 오히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기 어려운 요즘 《크리스마스 잉어》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잠깐 멈춰 서서 먹고사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것을 요청한다.

저자소개

1888년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의존적으로 살지 않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지지 아래 하프를 배웠다. 1907년에는 빈 교향악단에서 하프 연주자로 데뷔했는데 팔십여 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인 바움은 뮌헨의 한 풍자 잡지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이때 심사위원은 토마스 만이었다. 이후 올슈타인 출판사와 세 편의 소설을 계약하며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1929년에 발표한 《그랜드 호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바움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지닌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 시대를 대표했다. 하지만 나치 집권 후 독일에서 출판을 금지당했고 1938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전쟁을 겪으며 무력해지는 인간을 연약한 잉어에 빗댄 단편 〈크리스마스 잉어〉는 이 시기 미국에서 먼저 발표되었다. 작가로서의 경력이 절정일 때 발표한 단편 〈백화점의 야페〉, 쾰른의 한 신문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다시 한번 토마스 만의 상찬을 받은 단편 〈길〉, 갈망, 육식, 폭력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단편 〈굶주림〉 역시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에서 받은 압박감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발리에서의 삶과 죽음》(1937), 《호텔 베를린》(1943) 등이 있다. 1960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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