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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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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권구현 (지은이) 
  • 출판사문학일독 
  • 출판일202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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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인 모윤숙여사는

“영원히 문이 열리지 않았던들 차라리 애틋한 동경의 궁전으로나 바라볼 수 있을 것을”

하며 오랫동안 침묵에 담으려짓는 덕수궁 문이 십전씩에 해방된 것을 비탄하였다. 애틋한 서정시인의 감정이라 하겠다. 석일(昔日)의 영화를 일장의 춘몽으로 돌리고 무심한 까막까치만 오락가락하는 음울한 고림(古林)에 쌓여 우는 듯 조는 듯이 고요히 잠들어있는 구중궁궐의 옛날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에 누군들 강개지심이 없으랴? 그러므로 예로부터 시인들 가운데에는 슬픈 노래를 던진 분이 많았던 것이다.
--- “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중에서

저자소개

1898년 8월 17일 충북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 479번지에서 출생했다. 영동공립보통학교를 1915년에 졸업했고, 그 후의 학력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시집 ≪흑방의 선물≫에 동경 체험을 수록한 것을 보면 1923년에서 1926년 사이에 일본에서 유학했음을 알 수 있다. 유가족들은 그가 동경제국대학에서 수학했다고 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동경미술학교를 다녔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미술 평론과 개인 미술전을 개최한 이력을 통해 볼 때 그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소리[唱]에도 일가견이 있어 유랑 극단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재주와는 달리 그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홍효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술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고, “아내를 술집으로 내돌리는”, “문인으로서는 가장 고독하게 또는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1932년 영동으로 귀향했다가 만 4년 동안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가 여비가 없었기 때문이고, 귀향한 이유도 가난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귀향 후 흑성은 문학보다 미술에 전념해 1933년, 1934년에 걸쳐 동양화부에 입선했다. 그 후에도 그의 방랑은 계속되어 1938년 순천에서 박봉이와 동거 중에 자살해 만 40세로 삶을 마친다.

그는 1925년 8월 염군사와 파스큘라(PASKYULA)의 통합으로 발족된 카프의 맹원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후 1927년 카프 내부의 아나키스트와 카프 강경파의 논쟁으로 권구현은 그 조직에서 이탈해 1928년 1월 3일 이향(李鄕), 이홍근(李弘根) 등과 함께 ‘조선자유예술연맹’을 서울 낙원동의 수문사에서 조직한다. 권구현은 김화산, 강허봉, 이향, 이홍근 등과 동지의 입장에서 이론을 펼쳤지만, 실제 작품 활동에서는 춘원의 영향이 발견된다. 그는 시조와 자유시를 창작하게 되는데, 이는 춘원과 김화산의 영향을 받은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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